소인이 힘을 얻는 시기에는, 미워하지 않되 단호히 물러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 돈괘(遯卦)의 가르침입니다. 가만 보면, 물러날 때를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쪽은 대개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던 사람입니다. 돈괘는 주역 64괘 중 서른세 번째 괘로, 상괘 건(乾, 하늘) 아래 하괘 간(艮, 산)이 놓인 천산돈(天山遯)입니다. 흔히 이 괘와 함께 떠올리는 遯世无悶(둔세무민)은 사실 돈괘의 구절이 아니라 건괘(乾卦) 문언전에 나오는 말인데, 이 오해부터 이 글에서 바로잡습니다.
하늘과 산 사이에서 멀어지는 물러남, 주역 돈괘가 말하는 遠小人不惡而嚴
차례
돈괘란 무엇인가 — 괘상과 괘사 한눈에 보기
遯(물러날 돈)은 슬며시 피해 달아난다는 뜻을 담은 글자입니다. 돈괘(遯卦)는 하늘(乾) 아래 산(艮)이 놓인 모습으로, 하늘은 계속 위로 멀어지고 산은 제자리를 지키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괘 전체가 "거리를 두고 물러난다"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괘사는 遯,亨,小利貞(돈,형,소리정)입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면 형통하며, 다만 바르게 처신해야 다소 이롭다는 뜻입니다. 무작정 도망치라는 말이 아니라, 물러나는 방식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 항목 | 내용 |
|---|---|
| 괘명 | 돈괘(遯卦), 천산돈(天山遯) |
| 순서 | 주역 64괘 중 서른세 번째 괘 |
| 상괘 | 건(乾) — 하늘 |
| 하괘 | 간(艮) — 산 |
| 괘사 | 遯,亨,小利貞(돈,형,소리정) |
| 단전 | 剛當位而應,與時行也(강당위이응,여시행야) |
| 대상전 | 天下有山,遯;君子以遠小人,不惡而嚴(천하유산,돈;군자이원소인,불오이엄) |
단전(彖傳)의 剛當位而應,與時行也(강당위이응,여시행야)는, 굳센 효(양효)가 합당한 자리에서 서로 호응하며 때에 맞게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물러나는 것도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 시기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상전(大象傳)의 天下有山,遯;君子以遠小人,不惡而嚴(천하유산,돈;군자이원소인,불오이엄)은, 하늘 아래 산이 있는 모습을 보고 군자는 소인을 멀리하되 미워하지 않고 위엄있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괘사와 효사 전체 원문은 위키문헌 주역 하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둔세무민'은 사실 돈괘 구절이 아니다
돈괘를 검색하면 遯世无悶(둔세무민, 세상에서 물러나 있어도 근심이 없다)이라는 구절이 함께 따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돈괘의 괘사나 효사가 아닙니다. 건괘(乾卦, 64괘 중 첫 번째 괘) 문언전에서, 초구 潛龍勿用(잠룡물용, 물속에 잠긴 용은 쓰지 않는다)을 풀이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입니다.
헷갈리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遯世无悶의 遯 자와 돈괘의 遯 자가 똑같은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글자만 보고 같은 괘의 구절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괘, 전혀 다른 문헌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건괘 문언전 원문은 위키문헌 주역 상경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두 구절이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물러나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통합니다. 다만 인용할 때는 출전을 정확히 구분해서 쓰는 게 맞습니다.
항괘 다음에 돈괘가 오는 이유
서괘전(序卦傳)은 괘의 순서가 왜 그렇게 이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돈괘 앞에는 서른두 번째 항괘(恆卦, 오래 지속됨을 뜻하는 괘)가 있는데, 서괘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物不可以久居其所,故受之以遯(물불가이구거기소,고수지이돈)
만물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돈괘로 이어받는다는 뜻입니다. 항괘가 지속과 항상성을 다뤘다면, 그다음은 자연스레 물러나고 변화하는 흐름으로 넘어간다는 논리입니다. 오래 머문 것일수록 언젠가는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육효로 보는 여섯 가지 물러남
돈괘는 초육부터 상구까지, 물러나는 방식을 여섯 단계로 다르게 보여줍니다.
- 초육(初六) — 遯尾,厲,勿用有攸往(돈미,려,물용유왕): 물러남에 꼬리처럼 뒤처지니 위태롭습니다. 무리하게 나아가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 육이(六二) — 執之用黃牛之革,莫之勝說(집지용황우지혁,막지승설): 누런 소가죽으로 단단히 묶어 도무지 풀 수 없습니다. 굳은 뜻으로 자리를 지키는 모습입니다.
- 구삼(九三) — 係遯,有疾厲,畜臣妾吉(계돈,유질려,축신첩길): 얽매인 채 물러나려니 병이 날 만큼 위태롭지만, 곁의 사람을 돌보는 데는 길합니다.
- 구사(九四) — 好遯,君子吉,小人否(호돈,군자길,소인부): 좋아하는 것을 두고도 물러나니, 군자는 그리할 수 있어 길하지만 소인은 그러지 못합니다.
- 구오(九五) — 嘉遯,貞吉(가돈,정길): 아름다운 물러남이니 바르게 하면 길합니다.
- 상구(上九) — 肥遯,无不利(비돈,무불리): 여섯 효 중 가장 이상적인 물러남입니다. 살쪘다는 뜻이 아니라 미련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물러난다는 의미로 보는 해석이 많으며,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풀이됩니다.
이 여섯 단계를 오늘의 삶으로 옮기면, 대상전의 遠小人,不惡而嚴(원소인,불오이엄)이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를 흔드는 관계를 정리할 때 굳이 상대를 미워하거나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거리를 두는 태도만큼은 분명히 하면 됩니다. 艮卦(간괘)와의 차이는, 여러 해설을 종합하면, 艮이 멈춤 자체의 원리를 다룬다면 遯은 소인이 득세하는 구체적 상황에서 시기를 보아 물러나는 처세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궁금한 점 더 짚어보기
Q1. 돈괘에서 말하는 물러남은 은둔을 뜻하나요?
A1. 반드시 세상을 등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소인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맞서지 않고, 때를 보아 거리를 두는 처세에 가깝습니다.
Q2. 遯世无悶(둔세무민)이 돈괘의 구절인가요?
A2. 아닙니다. 遯世无悶은 건괘(乾卦) 문언전에서 초구 潛龍勿用을 풀이할 때 나오는 구절입니다. 遯 자가 같아 돈괘와 혼동되기 쉽습니다.
Q3. 여섯 효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물러남은 어느 효인가요?
A3. 상구(上九)의 肥遯(비돈)입니다. 미련이나 얽매임 없이 여유롭게 물러나므로 无不利(무불리), 즉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풀이됩니다.
Q4. 왜 항괘 다음에 돈괘가 오나요?
A4. 서괘전은 物不可以久居其所,故受之以遯(물불가이구거기소,고수지이돈)이라 말합니다. 항괘가 오래 지속됨을 다뤘으니, 그다음엔 자연스레 물러나 변화하는 순서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Q5. 돈괘와 간괘는 어떻게 다른가요?
A5. 여러 해설을 종합하면, 간괘(멈춤의 원리)는 멈춰야 할 때 멈추는 원리 자체를 다루고, 돈괘는 소인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시기를 살펴 물러나는 구체적 처세를 다룬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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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산 사이에서 멀어지는 물러남, 주역 돈괘가 말하는 遠小人不惡而嚴 |
누군가와 거리를 두어야 했던, 그러면서도 미워하지는 않으려 애썼던 순간이 있으셨다면 댓글에 남겨주시면 반갑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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